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군 (문단 편집) === 군율 === 더 세련되어진 면은 있으나 몽골군의 전술은 기본적으로는 유목민족들이 기존에 써오던 방식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티모시 메이는 '''엄격한 군율'''을 들었다. 유목민의 군대는 강하지만 병사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군의 섬멸이 아닌 전리품의 획득에 있었다. 따라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둔 후 노략질에 몰두하다가 적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약탈로 인해 기강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해 개인 차원에서의 약탈을 엄금했다. 적과의 교전에서 승리한 후 모든 병사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으며, 자신의 자리에 없거나 전리품 앞에 멈춰있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원칙적으로 약탈은 금지대상이었고, 전리품은 균등하게 분배되었으며, 일부는 몽골 고원의 수비대에게까지 전해졌다. 분배되는 전리품은 주로 옷감이었으며 [[비단]]과 모시를 받았다. 공을 세운 전사는 칸에게 청하여 훈장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때 훈장을 만들 금과 은은 자비로 마련해야 했다. 약탈이 허락되는 경우에는 명령에 의해 규칙적이고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병사들은 약탈할 집을 골라 화살을 꽂아둠으로써 그 가옥이 자신의 몫임을 알렸다. 다만 이렇게 약탈이 허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개전 초기의 공포전술을 위해서, 혹은 저항이 심한 거점이거나 항복했다가 배신한 도시에 한정했다. 항복한 도시는 최대한 약탈을 금지했다. 아울러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10명으로 이루어진 소대 중에서 1~2명이 적진을 향해 돌격하면 나머지 병사들은 이유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뒤따라서 돌격을 해야 했다. 만약 돌격하지 않으면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만큼 몽골군은 군율이 엄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